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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 품에 안길 '용산공원 미개방부지'를 걷다

미개방 부지 직접 걸어보는 '2025 용산공원 미개방부지 도보 투어'(10.22.~11.16.)
철조망 너머 용산기지의 역사와 문화적 가치…가려졌던 공간의 의미 살펴본 시간

2025.11.27 정책기자단 윤혜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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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9년 1월에 '용산기지 버스 투어'에 참가했던 적이 있다.

그때의 생경했던 기억이 지금까지 남아 있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든 느껴봄 직한 감정이었을 것이다.

서울의 정중앙에 있었건만, 우리가 마음대로 드나들지 못했다.

담벼락에 철조망이 쳐진 그곳을 지나가면 위축이 된다.

금단의 땅이었던 용산 미군기지가 지금 용산공원으로 조성 중이다. 

2019년 1월 '용산기지 버스 투어'에 참가하면서 바라본 용산기지 내 만초천.
2019년 1월 '용산기지 버스 투어'에 참가하면서 바라본 용산기지 내 만초천.

미군기지의 평택 이전으로 '미개방 부지'가 점차 열리고 있다.

지금 용산공원 장교 숙소 5단지, 용산어린이정원을 개방해서 국민 누구나 이용하고 있다.

두 곳을 제외한 나머지 용산공원 미개방 부지가 있다.

아직 국민에게 개방되지 않은 그 부지를 방문할 기회를, 국민의 알 권리를 충족하는 행사가 열렸다.

'용산공원 미개방 부지 도보 투어'다.

'2025 용산공원 미개방부지 도보 투어'는 지난 10월 22일부터 16일까지 진행했다.

'용산공원 미개방 부지 도보 투어'는 용산공원 미개방 부지에 대한 흥미와 배경지식을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시간을 갖기 위한 취지에서 마련된 행사다.

미군으로부터 용산기지를 반환받았다고 해도 아직 전면적으로 개방하지 않았다.

10월부터 두 달간 '용산공원 미개방 부지 도보 투어'가 열렸다. 11월 16일까지로 연장되어 진행되었다.
10월부터 두 달간 '용산공원 미개방 부지 도보 투어'가 열렸다. 11월 16일까지로 연장되어 진행되었다.

올가을 국토교통부 용산공원조성추진기획단이 추진하는 '2025 용산공원 미개방 부지 도보 투어' 신청 소식을 접했다.

용산공원 조성을 궁금해하는 국민들을 위한 반가운 소식이다.

필자는 두 코스를 다 신청해서 참석할 수 있었다. 캠프 코이너 부지에 이어 전쟁기념관 동측 부지까지다.

'용산공원 미개방 부지 도보 투어' 참가자들은 해설사의 설명을 들으면서 걸었다.
'용산공원 미개방 부지 도보 투어' 참가자들은 해설사의 설명을 들으면서 걸었다.

용산은 오랜 세월 외국군이 주둔했던 곳이다.

고려 말 몽골군의 병참기지로, 임진왜란 때는 왜군의 보급기지로, 청일전쟁 이후 청나라군과 일본군이 주둔하였고, 러일전쟁과 함께 조선주차군 사령부가 주둔하면서 일본의 무력에 의한 조선 지배의 근거지가 되었다.

이후 해방과 함께 미 24사단이 일본군 기지를 접수하면서 미군 기지로 바뀌었다.

◆ (코스1) 캠프 코이너 부지

코스1 - 캠프 코이너 부지 투어 경로. (출처=국토교통부 용산공원조성추진기획단)
코스1 - 캠프 코이너 부지 투어 경로. (출처=국토교통부 용산공원조성추진기획단)

첫 번째는 캠프 코이너 부지 투어였다.

참가자들이 문자로 안내받은 장소에 집결했다.

과거 카투사로 용산기지에서 근무했다는 하태영 해설사가 참가자들을 인솔했다.

하 해설사는 먼저 용산기지의 규모와 구성을 설명했다.

용산기지는 여의도 면적에 버금가는 크기로 축구장 400개에 이른다고 했다.

용산기지는 메인 포스트, 사우스 포스트, 캠프 코이너 3구역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메인 포스트는 전략적인 공간으로 기념식이나 행사가 열렸던 곳이다.

메인 포스트 중심에 한미연합군사령부가 있었다.

2022년 용산기지가 평택기지로 이전하기 전 한·미 동맹을 나타내는 가장 상징인 건물이었다.

사우스 포스트는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보이는 언덕으로 주거와 여가 공간이었던 곳이다.

캠프 코이너는 장병들의 휴식, 주거 공간에 더해서 교육 공간으로도 이용했던 곳이다.

용산고등학교 건너편 캠프 코이너 부지는 아직 일반인 출입이 불가하다.
용산고등학교 건너편 캠프 코이너 부지는 아직 일반인 출입이 불가하다.

용산기지는 미군 이전에 일본군이 주둔했던 곳으로 역사성을 띠고 있다.

일제강점기 때 일본군의 연병장으로 쓰였다.

6.25 전쟁 이후 미군이 주둔했을 때, 미군의 통신부대가 캠프 코이너에 들어왔다.

캠프 코이너 부지는 용산기지의 일부로서 북쪽 외곽에 자리 잡고 있다.

그런데 노스(North) 포스트가 아니다.

1953년 한국전쟁 중에 은성 훈장을 수여 받았던 랜돌 코이너 소위(Randall Coiner)의 이름을 따서 붙여졌다.

한국전쟁 직후 폭격으로 건물이 거의 전소되었고, 미군에 의해 새로이 지금의 건물이 지어졌다.

캠프 코이너는 용산고등학교 건너편이다.

이곳은 조선시대 수도 한성의 관문에 해당하는 숭례문으로 향하는 길목이었다.

물자가 오가는 국방상 중요한 요새였던 곳이다.

용산기지는 서울의 고도를 보존하고 있다. 참가자들이 내리막길을 보고 있다.
용산기지는 서울의 고도를 보존하고 있다. 참가자들이 내리막길을 보고 있다.

캠프 코이너에서의 이동 경로는 병영 막사, 교육관, 남단 터, 조직교육동, 행정 부서 순이었다.

하 해설사가 참가자들에게 이 길이 평지가 아니라는 것을 알려줬다.

해설사의 말을 듣고 고개를 돌려보니 내리막길의 위쪽에 있었다.

굴곡이 남아 있는 용산기지는 서울의 고도를 보존하고 있는 곳이라고 했다.

조선시대 왕들이 기우제를 지냈던 남단 터가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조선시대 왕들이 기우제를 지냈던 남단 터가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캠프 코이너에서 눈여겨 봐둘 곳이 있다.

조선시대 왕이 직접 하늘에 기우제를 지냈던 곳, 남단 터다.

용산기지에 주둔했던 미군도 우리의 문화적 자원을 알고 있었다.

남단 터에 기우제의 제단으로 쓰였던 석돌을 제거하거나 파손하지 말라는 경고문을 세워두고 있었다.

국적을 초월해서 문화유산의 진정한 가치를 알아보고 있었다.

미군기지가 워낙 넓어서 버스, 자동차 등이 운행했다.

그런데 신호등이 없다고 기억하는 분들이 많다고 한다.

미군기지 내에서 차량으로 이동할 때 운행속도를 잘 지켜서 신호등이 없는 것으로 인지했기 때문이란다.

용산기지 건물은 미국식 생활의 단면을 보여준다. 벽면에 난방기가 있다.
용산기지 건물은 미국식 생활의 단면을 보여준다. 벽면에 난방기가 있다.

미군이 생활했던 건물의 특이점이 있다.

전압이 110V 전용이다.

미국은 110V의 전압을 사용하는데, 용산기지의 건물에도 똑같이 적용하고 있었다.

또한 실내에 보일러가 없었다.

한국식 온돌 난방을 하지 않는 그들은 실내에서 신발을 신고 생활한다.

건물의 벽면에 히터를 설치해서 공간을 따듯하게 했다.

건축물을 살펴보면서 용산기지의 미군은 국내에 주둔하고 있으면서도 미국식 생활 방식을 고수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캠프 코이너에 군사 훈련하면서 야영 텐트를 쳤던 드넓은 공간이 있다.
캠프 코이너에 군사 훈련하면서 야영 텐트를 쳤던 드넓은 공간이 있다.

을지훈련이나 한미연합훈련 등을 할 때 야영 텐트를 쳤던 드넓은 곳도 있었다.

지금은 그곳이 잔디와 풀로 무성했다.

◆ (코스2) 전쟁기념관 동측 부지

코스2 - 전쟁기념관 동측 부지 투어 경로. (출처=국토교통부 용산공원조성추진기획단)
코스2 - 전쟁기념관 동측 부지 투어 경로. (출처=국토교통부 용산공원조성추진기획단)

두 번째는 전쟁기념관 동측 부지 투어였다.

전쟁기념관 동쪽에 있어서 참가자들이 전쟁기념관 야외 전시장에 집결했다.

전쟁기념관 동측 부지는 주한미군기지의 중추적인 역할을 했던 공간이다.

전국에 산재한 주한미군기지를 연결하는 교통의 허브 역할을 담당했던 시설이 남아 있다.

또한 도서관, 우체국, 버스터미널, 볼링장 등으로 사용되었던 7개의 건물이 있다.

서울시에 근무할 적에 용산공원 조성 사업에 참여했던 김홍렬 해설사가 본격적인 투어에 앞서 용산공원 조성에 관해서 설명했다.

용산공원 조성 예정 부지는 약 300만㎡에 이른다.

미군기지 23만㎡, 주변 부지 60만㎡까지 포함한다.

용산공원을 조성하는 사업은 단순히 한 곳의 공원을 조성하는 것이 아니다.

용산구 안에 새로운 도시를 만드는 프로젝트라고 할 만큼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미군 여가생활의 일부를 보여주는 볼링장의 내부.
미군 여가생활의 일부를 보여주는 볼링장의 내부.

용산기지 내 1,100개의 동이 있다.

이곳의 북쪽은 업무 시설, 남쪽은 생활 구역이었다.

미군이 북쪽으로 출근해서 남쪽으로 퇴근했다.

업무 시설과 생활 구역 사이에 편의시설이 있었다.

전쟁기념관 동측 부지 이동 경로는 볼링장, 멤버스클럽, 커뮤니티센터, 재정지원단, 도서관, 우체국/교육센터, 서울프렌드쉽 아케이드 순이었다.

처음 만나는 건물은 미군이 여가 생활로 즐겼던 볼링장이다.

볼링장이어서 15개의 볼링 레인이 있는 통 구조로 되어 있었다.

정전협정을 체결할 당시만 해도 미군이 잠시 머물다가 본국으로 돌아갈 거라고 생각했다.

1953년 10월에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면서 미군이 이곳에 주둔했다.

따라서 본래의 건물이 증축된 곳도 여럿 있다.

김 해설사가 과거의 사진과 지금의 건물을 비교해서 보여줬다.

셔틀버스 정류장의 흔적이 바닥에 숫자로 남아 있다.
셔틀버스 정류장의 흔적이 바닥에 숫자로 남아 있다.

셔틀버스 정류장도 있었다.

바닥에 숫자가 표시되어 있다.

이곳이 미군기지를 연결하는 교통 허브 같은 역할을 했던 곳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커뮤니티센터의 2층에 미디어실이 있어서 셔틀버스를 기다리면서 TV나 잡지를 볼 수 있었다.

서울프렌드쉽 아케이드의 과거 사진과 현재 모습을 비교해서 볼 수 있다.
서울프렌드쉽 아케이드의 과거 사진과 현재 모습을 비교해서 볼 수 있다.

서울프렌드쉽 아케이드가 있었다.

면세점과 같은 곳이다.

원래 두 개의 건물이었던 곳을 기둥만 남겨둔 채 벽을 헐어서 하나의 공간으로 활용했다.

처음엔 창문이 있었는데 창문을 다 막았다.

목적은 하나다.

쇼핑 공간에 들어왔다면 창밖을 보지 말고 물건만 사가라는 뜻이다.

우리나라 백화점이나 대형마트에 바깥으로 난 창문이 없는 것과 같다.

용산공원을 설계한 지 10년이 넘어가지만, 미군으로부터 아직 완전한 반환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과거보다 긍정적인 점은, 작년까지만 해도 버스로 투어했던 이곳을 도보로 투어할 수 있게끔 변화한 것이라고 했다.

푸드트럭이 들어와서 참가자들이 핫도그를 먹으면서 해설사의 설명을 들으면 어떨까?

김 해설사의 말에 참가자들 모두가 "정말로 그랬으면 좋겠어요." 라고 기대감을 드러냈다.

김홍렬 해설사는 "용산공원을 조성하되 미군이 사용했던 건물을 폐기하지 않고 용산기지 아카이브 기록물처럼 보존하는 방향으로 진행하고 있어요. 용산공원을 조성하면서 오래된 나무를 온전히 살린다면 좋겠어요." 라고 말했다.

김 해설사의 말을 듣고 주변을 둘러보니 건물과 건물 사이에 울창한 나무들이 많았다.

가을에 단풍으로 물들어가는 나무가 있어서 건물만 덩그러니 남아 있는 용산기지가 삭막해 보이지 않았다.

용산공원이 조성된 이후에도 용산기지 내 오래된 나무가 온전히 보존되기를 바란다.
용산공원이 조성된 이후에도 용산기지 내 오래된 나무가 온전히 보존되기를 바란다.

'용산공원 미개방부지 도보 투어'는 일회성 행사가 아니다.

이번에 참가하지 못했어도 추후에 열리는 투어에 참가할 수 있다.

용산공원 개방 부지도 있다.

용산공원 장교 숙소 5단지, 용산어린이정원은 미군의 생활 구역이었던 공간이다.

붉은색 벽돌로 단장한 이층집은 미국의 주택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 같다.

실제 미군과 가족들이 거주하면서 생활했던 공간이다.

국민에게 열려 있고,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누구든 개방부지를 이용할 수 있다.

용산공원을 조성하기 전 '용산공원 미개방부지 투어'에 참가해 보길 바란다.

철조망 담장 너머 미군들만의 세계였던 그곳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살펴볼 기회다.

대한민국 국민의 품으로 돌아오고 있는 그곳의 변신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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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산어린이공원 및 장교 숙소 5단지 누리집(park.go.kr)


정책기자단 윤혜숙 사진
정책기자단|윤혜숙geowins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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